2012. 12. 11. 21:32ㆍ피터 럭크만의 주석서/로마서
로마서 1장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된 바,
1:2 (이는 그분께서 자기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3 이 복음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으로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1:4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1:5 그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믿음으로 순종케 하나니
1:6 그들 가운데서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니라.
1:7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된 바,』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지칭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말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께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수차에 걸쳐 역설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하고 일부
서신서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고전 1:1[1])이라든가, “사도된 바울”(고후 1:1[2], 갈1:1[3], 엡
1:1[4], 골1:1[5], 딤전 1:1[6], 딤후 1:1[7])이라는 말로 서두의 운을 떼고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가장 즐겨 붙이는 신분 명은 역시 『종』이다.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종
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
들임을 그가 강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1:10에서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랴? 아니면 하나님께 사랴? 아니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겠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
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 (고전 6:20)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
한다. 성경은 또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3)고 명령한다. 이것
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종”은 “종”이되, 노예시장에서 낙찰된 “노예”라는 뜻이다. 당신은 팔려고 노예시
장 경매에 내어 놓여진 노예였다. 그런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들이셨다. 값을 치르고 말이다. 그분
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으므로 당신은 이제 그분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당신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바
로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분 말고 “사람”을 섬겨서는 안 된다. 당신의 목숨은 그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
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무엇이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싫어한다면 그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이것이 여기 1절에서 바울이 운을 떼고 있는 첫마디 말이다. 여기에 이어 두
번째로 하고 있는 말이 자기가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언급인데,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천명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 목사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목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
라 “직업상” 목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지
만, 실은 그들 스스로가 목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1절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되었다고 말한다. 즉 부르심
을 받았다는 것은 성별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별』되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거룩하게
구별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순간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되, 그것이 “무
엇으로부터” 차단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으로” 성별해야 함을 강
조한다. 사람들은 『성별』이라는 말을 하면서 의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말을 한다. 물론 세상으
로부터 구별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별』이 무엇으로 “부터” (from) 구별되었다기보다는 무엇
“에게로” (unto) 구별되었음을 강조한다. 절간에서 목탁만 두드리고 앉아 있는 사람도 속세로 “부터” 등을
돌린 사람이니 세상 “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인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
람이 무엇에게로 구별되었느냐 하는 점이지, 단순히 무엇을 끊었느냐 하는 게 아니다. 성경은 “세상으로
부터” 나와 “하나님께로” 성별해야 함을 강조한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복음에로의 성
별”을 했다. 하나님의 복음에게로, 곧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된 것이다.
『이는 그분께서 자기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주님께서는 예컨대 『하나
님의 복음』(1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약속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분명히 기록되었으
되, 선지자들 스스로에게 마저 그 전모가 다 명료하게 밝혀졌던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은 선지자들 특유의
진술 스타일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전모를 명료하게 찾아낼 수 없었던 것들도 없지 않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 땅에 오시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들의 진술 속에서 이 약속을
찾아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오셔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우리는 선
지자들의 진술을 통하여 이 약속을 성경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는데, 이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셨던
일이었지만, 선지자들이 이 약속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도 아니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명료하게 서술해 놓
았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마저 이 약속을 그들의 진술 가운데서 모두 명료하게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가 않다. 이처럼 주님의 약속들에 대한 선지자들의 진술 중 일부는 우리가 단지 그 윤곽만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 복음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으로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3절).
여기서 『육신으로는』이라고 언급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초림하셨을 때, 울기도 하셨고 고난
도 당하셨으며 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고 죽으셨던 순전히 육신적 관련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주님의 육신은 『다윗』의 계보에 따른 것이었다. 이 구절에서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
셨으며』라고 진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씨이셨다”는 말
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다윗의 씨』가 아니셨다. 『다윗의 씨』는 여코냐왕 때 이미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
다. 예레미야 22장에서 여코냐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식도 없고 평생에 번성치 못할 것으
로 저주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씨에서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더 이상 없을 것』
(렘 22:30)임을 선포해 두셨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육신에 관한 한 “처녀”의 몸에서 나셔야만 했
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 절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다음 4절에서 주님께서 영으로는 누구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천명하고 있는가? 『거룩의 영으로는…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자 그대로의 『다윗의 씨』가 아니셨고 다만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씨』의 계보인 “처녀”의 몸에서 나실 수밖에 없으셨으며, 그 처녀가 바로 마리아였고 마리아는 다
윗의 계보 출신이었다. 마리아가 다윗의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은 누가복음 3장에서 분명하게 분명하게 밝
힌다.
누가복음 23장23절부터 읽어보라. 여기를 언뜻 보면 표면상으로는 마치 요셉의 계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3절에서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라고 언급하지만, 실은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 아니라 “사
위”였다는 점에서 헬리는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아버지였고 요셉의 장인이었다. 따라서 누가복음 3:23[8]
부터 시작되는 계보는 요셉이 아니라 사실상 마리아 쪽 집안의 계보인 것이다. 성경에서 이따금 “아들”이
라는 어휘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고 해당 구절들을 “문제 구절들”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아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직계 아들”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데서 비롯된 비롯된 혼란일
뿐이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로 서술되기도 하고 “아브라함의 아들”로 기술되기도 하지
만 (마 1:1[9]), 이들이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아들”이라고 표현했을 뿐 사실은 수십
대 후손들이다. 그리고 또 여기 누가복음 3:23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아들(로 알려졌던 바)』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호적상으로만 요셉의 아들이셨을 뿐 실제로는 요셉이 낳은 친아들이 아니라 구태여 말
한다면, 요셉의 “의붓아들”이신 셈이다. 요셉의 계보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온다. 그것은 다윗으로부터 요셉
까지 내려오는 “왕의 계보”이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의 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선포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
셨다. 어떻게 말ㅇ니가? 『능력으로』 선포되셨다. 어떤 능력 말인가? 『거룩의 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에 따라 그 『능력으로』 그렇게 선포되셨던 것이다.
그런즉,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다. 그분께서 죽은 자들
로부터 일으켜지셨을 때, 그분께서는 요셉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도 아니요, 문자 그대로의 다윗의 씨로
오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아버지의 씨로 태어나셨다면 부활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
다. 베드로도 사도행전 2장에서 행한 설교 가운데서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족장
다윗에 관하여 너희에게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어 장사되어서 그의 묘가 오늘까지 우리 가
운데 있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선지자가 되어 육신을 따라 그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그의
보좌에 앉게 하신다는 맹세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것을 알고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
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
니하였다는 것이라』 (행 2:29-31).
이처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예
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되 그분의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현대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
다. 그런가 하면 또, 동정녀 탄생에 관해 마태가 이야기했고 누가가 이야기했을지언정 바울은 이런 이야
기를 한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 4절에서 그분께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
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분의 부활이 증거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분께서 만약 요셉의 아들이셨
다면 벌서 예루살렘 밖 무덤에서 흙으로 돌아가 사라지고 마셨을 것이다. 그분께서 요셉의 아들이셨다면
그분께서는 일으켜 지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가 죽었다가 그런 식으로 다시 살
아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휴거되지 않는 한 누구나 예외 없이 한
번은 죽게 되어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누구도 죽었다가 부활하여 무덤에서 다시 살
아 일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증거하고 동시에 그분의 동
정녀 탄생은 그분의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이처럼 상호 증거 관계를
갖는 사건들이다.
당신이 불교 신자로서 만약 석가모니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무슨 “사리”인가 뭔가 하는 것
이 석가모니의 유골이라고 믿는다만), 당신은 여전히 독실한 불교신자 노릇을 할 수 있을 테고, 당신이 만
약 이슬람교도로서 어디선가 모하멧의 무덤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독실한 정통 회교도로 간주되겠지만,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뼈
를 한 조각이라도 어디서 찾아내게 된다면, 당신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게 된다. 그리
스도께서 무덤에 그냥 누워 계시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그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믿음으로 순종
케 하나니』(5절).
이 구절에서 『믿음으로 순종케 하나니』라는 말씀에 주목하여 『믿음』이 『순종』과 어떤 관계가 있고 『순
종』이 『믿음』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어구의 기본 의미는 “순종에서 믿음으
로” (obedience to the faith), 즉 “순종함으로써 믿음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캠밸주의자들은 구원은 물침례에 있고, 물침례는 구원의 핵심 부분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물침례를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일부 침례교인들은 물침례가 구원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핵심 요소인 것 같지는 않고 다만 물침례는 『순종』의 핵심요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순종』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핵심 사항으로 말한다면 여기에는 갖가지
다양한 것들을 다 손꼽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종』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을 그런 식으로 말한
다면, 가령 성경을 읽는 것도 『순종』의 핵심 사항이랄 수도 있고, 하다 못해 『순종』하기 위해 마음속에 품
게 되는 관대함마저도 『순종』으로 가는 필수 사항이랄 수 있을 것이다. 『순종』에 필요한 핵심 사항들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가 바로 캠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물침례를 받는 것은 복
음에 순종하는 일이다”라는 논리 전개의 길을 열어 놓게 된다는 점이다.
과연 그러한가? 물침례는 과연 복음에 순종하는 행위인가? 이 문제를 여기서 한번 따져 보아야겠다. 먼
저 로마서 10장을 보고 그 다음 로마서 16장을 보라. 그러면 물침례가 복음에 순종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정말로 복음에 순종코자 한다면 물침례를 받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얘기
다. 이 문제는 사도행전 2장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 내용과 함께 워낙 오래 동안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
어왔던 터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혼란을 가져온 논란거리였으며, 그 결과 복음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물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몸” 거의 전체를 한 덩어리로 지배
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물 속에 뛰어드는 것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을 보자. 로마서 10:16이 『그러나 그들이 모두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니라. 이사야가 말하
기를…』 “주여, 누가 침례를 받았나이까? 라고 되어 있는가? 이 구절은 결코 이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었느냐”고 되어 있다. 그 다음 17절을 보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
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고 말씀한다. 분명하지 않은가? 복음에 순종해야 믿음을
갖게 된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말씀이 아닌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은 그 복음 안에서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에는 로마서 16장을 보자. 여기를 보면 물침례를 받는 것으로는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인
정하는 것이 곧 복음에 순종하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로마서 16:26을 보라. 『이제 나타났으며 영원하
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지자들의 성경을 통하여』 “무엇으로 순종하게 하고자” 모든 민족에게 알려졌
다고 말씀하는가? “침례”로 순종하게 하고자 했다고 말씀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
구절은 선지자들의 성경을 통하여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번에는 사도행전 15장으로 가 보자.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설교했던 시몬 베드로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적어도 15,6년이 지난 뒤) 사도행전 15:7-9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많은 논의가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당신들이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운데 택하시어 나의 입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느니라. 마음을 아시는 하나
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증거하시어 성령을 주셨으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아니하셨으니…』, 그 다음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잘 보라.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느니라』 무엇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다고 했는가? “침례”로? 아니다. 『믿음으로』이
다. (세례가 아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물며 “물 뿌림” 따위는 말도 꺼낼 수가 없다) 그런즉, 복음을
믿는 것이 곧 복음에 순종하는 것임이 여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여기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베드로가 여러 해 전 사도행전 2장에서
는 유대인들을 상대하느라 “딴소리”를 했다는 사실이고 이것을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한 채 사도행전 2장
에서 걸음을 딱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8절, 39절 부분에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촉구하면서,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한 것이며, 또
한 먼 곳에 있는 모든 사람, 즉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
말은 마치 물속에 들어가야만 그게 바로 순종이고 믿는 자로 간주되어 구원받게 된다고 역설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신약 가운데서 사도행전 2장은 “세탁쟁이들”에 의하여 가장 많이 읽히는 부분이 되었고
일부 침례교인들마저 여기에 가담한다. 그러나 당신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
다면, 당신은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고, 당신은 지옥을 향해 내닫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고 구원을 받는 게 절대로 아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사도행전 2:38을 어찌나 오래 동안 귀따갑게 홍보해 왔던
지 이제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구언을 위한 금과옥조는 반드시 사도행전에서 찾아
보아야 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베드로가 이 설교를 시작하고 있는 부분부터 읽어
봐라. 그는 14절부터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 내 말에 경청하라』는 말로
입을 시작한다. 그리고 15절, 16절, 17절…이렇게 주욱 설교를 이어가고 있는데, 39절까지 한 번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보라. 그리고 그 어디에 죄에 대한 “피의 속죄” (blood atonement) 이야기가 한마디라도 언급
되고 있는지 눈을 씻고 찾아 보라. 성경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고 선언한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까닭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의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에는 피흘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을 붙잡고 있다가는
그 누구도 지옥행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여기에 머물고 있는 바람에 지옥으로 달려갈 사람들이 앞
으로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는 “피의 속죄”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설교하
고 있는 베드로는 아직 “피의 속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상태였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9장에 가서야 비
로소 “피의 속죄”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으로 구원 관련 구절로 너도나도 사도행전 2:38을
들먹거린단 말인가?
자,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죄들을
위해 내 아들이 죽었고 성경대로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다. 이제
그를 믿고 너의 구주로 영접하라. 그러면 지옥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지옥이 걱정되거든 내 아들에게 의
지하라. 내 아들을 믿고 그를 너의 구주로 영접하는 한 너는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돼 있는 복음의 개요다. 나는 이에 순종했다. 내가 이에 순종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
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한 것이다. 지옥으로부터 나를 지켜 달라고 그분께 의탁한 것이다. 바로 이것
이 내가 복음 안에서 나의 믿음을 실행한 것이다. 나는 복음 위에 내 혼을 올려 놓고 안식을 취한다. 이것
이 내가 지옥에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침례”만을 의지한다면 당신은 복음에 대해 순종
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한 것이다. 순종의 필수 요소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7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1]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
[2]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과 ~
[3] ~사도 된 바울과
[4]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5]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과 ~
[6]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7]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8] 예수 자신은 약 삼십 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고, 요셉의 아들로 (알려졌던 바)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헬리는 맛닷의 아들이요, 맛닷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멜키의 아들이요, 멜키는 얀나의 아들이요, 얀나는 요셉의 아들이요,
[9]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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