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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1. 20:35피터 럭크만의 주석서/갈라디아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20절).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구주와 살아계 신 주님이신 그분 안에 놓여 졌다. 에베소서 2:8[1]을 참고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주신 믿음은 내가 사는 방법이다.” 본문에 대한 더멜로우의 비참한 주석은 전체를 과거 역사에 적용해 버림으로써 바울 개인의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20은 성경 전체에서 오늘날의 성도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가장 위대한 구절 중 하나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나니…』 (21절). 베드로 당신도 그럴 수 없다.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 (21절). 의는 율법으로 인하여 오지 않았으며 (롬 10:1-4[2]), 전가 (imputtation)로 인해 왔다 (롬 4:1-5[3]). 의를 행위로 얻으려는 자들에게는 결코 의의 전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롬 4:5[4]). 그리스도를 영접하길 거부하는 자들은 은혜를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진리는 칼빈주의의 표준신학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무조건적인 선택 등)과 상반되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은 모두 지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선택된 자들을 불러 내셨다”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곧바로 본문에서 “frustrate” (저버리다)라는 단어를 변개시킨다.

<필립스역본>은 “stultify” (무효화시키다)로, 케네스웨스트는 “thwart” (방해하 다)로, NEB (1961)는 “nulifty” (취소하다) 로, RV (1881)는 “reject” (거부하다)로, ASV (1901)는 “make void” (무효화시키다)로 변개시켰다.

잘 보라. 1880 년부터 인정받는 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시키고 혼란시키는 일뿐이었다.

“frustrate” (저버리다)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하고자 원하는 것을 막을 때 사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이다. 존 칼빈(카이퍼, 댑니, 핫지, 스트롱, 위필드, 메이첸, 로스, 질핀, 청교도들)은 구원이 왔을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선택된 자들”이 구원받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탄생” 이후에 “회심”과 “회개”가 뒤따른다고 믿고 가르친다 (엡 1:5 주석 참조).

 

엡 1:5 주석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 (5절). 여기서 마틴은 칼 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 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본문은 칼빈주의 체계의 핵심인데, 이 구절을 로마서 9:16,18[5]과 합하여 그 위에 제한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무조건적인 선택, 전적 타락과 같은 체계가 세워졌다. 이 체계는 사람에게 알려진 것들 중 가장 심한 신학적 모순을 담고 있으며, 그 신학 뒤에 있는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은 논리작용을 왜곡시킨다.

1.     나는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과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엡 1:5) 임의적으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나의 동의 없이 행하시지만, 그분은 나를 위해 결정을 하셨기에 (롬 9:6[6]) 구원받기 전에 나는 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3.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시고, 그들만을 위해 속죄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속죄하셨다면 하나님의 의지가 꺾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을 택하시는데 있어서 어떤 근거를 가지시는 것은 행위로 인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어깨를 으쓱하며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분 자신의 목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얼마나 내가 겸손한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체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들이 만약 창세기 1:1 이전의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창세기 1:1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판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가? 벌콥에 의하면 모든 하나님의 판결들은 영원하다. 그런데 벌콥은 어떻게 그것을 알아냈는가? (롬 11:34-35[7]) 그들은 이미 만일 어떤 사람이 그분의 속죄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으며, 성경이 (히 10:29[8])속죄는 제한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벧후 2:1[9])그들은 속죄가 제한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 (벧후 3:9[10])를 거부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사실 모든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왜 선택된 자들이 구원받고 버림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지를 정확히 안다고 고백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그것을 “자유의지”와 연관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개인이 구원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의지”에 모든 강조점을 두고 계신다 (사 14:13-14[11], 요 5:40[12], 마 23:37[13], 행 7:51[14], 계 22:17[15]).

진리는 하나님께서 누가 영접하고 거절할지를 아신다는 것이며 (롬 8:29[16], 벧전 1:2[17]), 영접한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자녀로 입양” (엡 1:5)하시려고 “선택”하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독자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의 손을 올리며 “알라의 뜻대로! 운명대로! 라고 말할 때까지 지치게 만들도록 고안된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야만 한다. 칼빈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는 곳에서 자유의지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요 1:11-13[18]). 더 분명히 말하자면 칼빈은 구원받지 않은 죄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는 진리를 부인한다. 만일 그 죄인이 선택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의 동의 없이 성령에 의해 압도당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선택되지 않았다면 결국 그는 죽게 되고, 설령 그가 결정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의 “시체”는 그리스도를 거부한 데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에는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그들의 입장을 이처럼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며 이러한 묘사는 “중상모략”이며 “잘못된 표현”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개혁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을 대강만 보더라도 이것이 그들의 정확한 입장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반대 입장이 개진되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신학체계와 모순되 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벌콥, 댑니, 칼빈, 아더 핑크가 제시한 주장보다 더 모순되는 이론 체계는 없을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밝히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아들을 영접할 지 그렇지 않을 지를 그들이 그 일을 하기 전에 미리 알고 계셨다.

2.     이 미리아심의 근거 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

3.     어떤 인간의 공로도 고려되지 않지만, 칼빈과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원하는 의지를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진짜 칼빈주의자들이 비록 “미리아심”을 지우지 않고 자유의지를 없애는 동안, 자유의지를 믿는 사이비 칼빈주의자 (케네스 웨스트)는 “미리아심”이란 단어를 지워야만 한다. 여러분은 “그렇게 간단한가?” 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과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칼빈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하여 아무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전적 타락”의 교리와 죄인의 죽음을 지지하기 위해 칼빈은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제거하였으며, “의지”가 타락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포함하여, 행 7:51[19]) “타락”이 사람의 정신적이고, 감정적이며 영적인 구조에까지만 확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지”는 마음의 기능이지, 생각이나 느낌이나 영감처럼 마음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의 아들을 영접할 지 거부할 지를 아시지만, 그것은 그들의 책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모든 성도들을 바울이 명백히 회심했던 것 같은 (행 9:3[20]) 강제적인 회심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나 믿음이 있기 전에 엎드러지고, 압도되며, 눈멀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강경 침례교도들, 원시 침례교도들, 주권적 은혜론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이며 확산시키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저버 리다”가 삭제된 것이다.

필립스 역본과 웨스트는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20세기에 사용되지 않는 고어를 사용했다. NEB, RSV, ASV, RV는 교리를 만들어 내어 원래 영감으로 기록하신 분의 의도와는 다르게 바꿔 놓았다. 그가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 (nulify)시킬 수는 없다. 본문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거부하지 (reject)않았는데, 이는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 은혜를 저버린 것이다 (frustrate). 은혜는 그것을 율법과 섞을 때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롬 11:6[21]).

<킹제임스 성경>이 절대적으로 (100%) 옳다. 1881년 이후부터 새로운 번역본들은 하나도 개선시킨 것이 없다.



[1]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형제들아,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니, 즉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니라.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하노니,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3] 그러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에 관하여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었다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수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4]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5]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7]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 분의 의논자가 되었느냐? 누가 먼저 그 분께 드려서 되돌려 받겠느냐?

[8]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또 자신을 거룩케 한 그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 은혜의 영을 모욕하는 자가 얼마나 더 심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생각하라.

[9]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마저 부인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10]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11]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2]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13]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14] 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

[15]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 없이 마시게 할지어다

[16]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충만할지어다

[18]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   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

[19] 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 도다

[20] 그가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21]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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