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3. 18:47ㆍ피터 럭크만의 저서/신약교회사
195개의 체찍 자국을 몸에 지닌 바울같은 사람은
면세회사인 기독교학교를 경영하는 배부른 사장님이나
유약한 교수님들과 도저히 같은 자리에 놓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전기줄을 뽑아 다른 곳에 잘못 꽂아 넣지 않고서는
양자가 연관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바울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망원경이나 있어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어거스틴을 바울 노선에 갖다 놓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교회사에서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언급할 때면 늘
제2, 혹은 제3의 "최적자"를 찾으려 하는데
그러나 바울과 "함께 달려간" 사람들 역시
비쳐, 웨더헤드, 틸리히, 마이클 루터 킹 주니어, 애버내씨, 풀톤 쉰,
교황 피오2세,10세,11세,12세, 바르트, 부르너,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23세 등과 같은 잡종 부대하고는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카톨릭 교황들은 그 어떤 면에서도 닮은데라고는 없다.
바울은 그 누구도 자기에게 왕관을 씌우도록 허락지 않았으며
베드로 역시 자기 앞에 절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바울이 금관을 쓰고 "평화, 인권, 억압받는 대중"들에 관해 입발린 소리를
매스컴에서 말하고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로마서를 쓴 사도가 금반지를 끼고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성상들에
둘러싸여 정치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해서든지 유엔 기금을
뜯어내서 교구 학교에 보태보려고 연설을 하고 있는 꼴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더 이상 말을 말자.
바울은 고난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베드로는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시대 초기 1,2세기 동안은 이 고난의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남녀노소 어른아이 부자 가난한 사람 구별없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못 박히신 발자취를 따라 겟세마네를 지나 재판정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하나님께서는 피가 튀기는 형장에서,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형대 위에서,
야수의 울부짖음 속에서도
그의 자녀들을 관 씌우셨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기도"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림에 매우 익숙해 있다.
그곳에 보면 임명받은 양무리의 장로인 "감독"이 서 있다.
그를 보라. 그가 자주와 진홍빛 옷을 입고 있는가?
그가 성당의 대리석 보좌에 앉아 계신가?
3중관은 어디 있는가? 염주알은?
팔에 걸치는 수대는? 허리띠는?
견대는? 금반지는 ?
그런 것들은 전혀 없다.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 마저 빼앗기고
오히려 사자의 먹이가 되기 위해 서 있으며 그의 피묻은 옷은
모래 밭에 조각조각 널려져 노예들이 치워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가?
바로 로마이다.